애프터 옥토버: 한국 사회의 포스트 트라우마와 시각 예술

애프터 옥토버: 한국 사회의 포스트 트라우마와 시각 예술

최근 한국 퀴어/페미니즘 문학의 에토스에 대한 메모

박종주

2026-09-08

작업실 일부를 열어두었을 뿐인데 자연스럽게 커머닝이 발생했고, 주변의 작은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안전1하다는 감각을 느끼며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자리가 특별한 마을이 되고, 도시 전체로 번져 나갔습니다. 정책이나 계획이 만들 수 없는, 오직 예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팩토리 역시 창성동의 지난 20년 동안 그런 존재이고 싶었고, 충분히 그랬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미술작가 최윤은 한국의 모더니티가 만들어낸 상투적 풍경과 부산물을 적극적으로 작업에 차용한다. 이동통신사의 현란한 홍보물, 분식점 메뉴판, K-아이돌의 유행가, 흔히 원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잡한 벽지와 스티커 같은 것들을 수집하고 재구성해 전시장을 ‘도배’한다. 한편, 그의 작업을 저장하고 그 플로우를 만드는 웹사이트 www.yunyunchoi.com에서 우리는 최윤의 ‘무의식’이라 불러도 좋을만한 방대함과 치밀함을 경험한다. 집착적인 자기 서술과 자가 갱신을 거치며 계속해서 안과 밖이 변모하고2 의미-존재적으로 내파하는 최윤의 작업 세계는 생물의 발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업 제목의 단어들, 영상과 퍼포먼스 속의 말소리들, 실제 전시장의 벽과 바닥에 ‘깔린’ 이미지들은 음성이자 물질로서, 자리를 바꾸고 다시 한 자리로 집적(集積)하며 보는 이들을 에워싼다. 말, 말이 되지 못한 소리, 그리고 문자, 문자가 되지 못한 이미지는 최윤의 현기증 나는 세계관3을 이루는 재료다. 라익스 아카데미 레지던시 참여를 위해 서울의 거리를 떠나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는 언어-이미지 채집자이자 제작자, 최윤을 인터뷰했다.

지난 20여 년 사이 서울은 훨씬 촘촘해졌고, 조용한 뒷골목이었던 창성동은 어느새 큰 길이 되었습니다. 동네의 1층은 패션숍과 인터내셔널 브랜드들로 채워졌고, 길을 향해 큰 창을 낸 팩토리는 주변의 다이나믹과 점점 달라져갔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어색함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돈 냄새 나지 않는 비영리 공간이 서울 한가운데 1층에 있는 것도 나름 쿨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달래면서요. 그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채웠지만,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팩토리2의 예술적 시도를 접하고 새로움을 느끼거나 소수성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팩토리2와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호흡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더 들썩이는 리듬으로 소비되고 빠르게 변해가는 풍경 앞에서, 오히려 우리만의 작은 감각을 더 담담하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금 더 오래 이 자리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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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바이럴 링구아(Viral Lingua)〉4, 2021, 단채널 비디오

미술작가 최윤은 한국의 모더니티가 만들어낸 상투적 풍경과 부산물을 적극적으로 작업에 차용한다. 이동통신사의 현란한 홍보물, 분식점 메뉴판, K-아이돌의 유행가, 흔히 원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잡한 벽지와 스티커 같은 것들을 수집하고 재구성해 전시장을 ‘도배’한다. 한편, 그의 작업을 저장하고 그 플로우를 만드는 웹사이트 www.yunyunchoi.com에서 우리는 최윤의 ‘무의식’이라 불러도 좋을만한 방대함과 치밀함을 경험한다. 집착적인 자기 서술과 자가 갱신을 거치며 계속해서 안과 밖이 변모하고 의미-존재적으로 내파하는 최윤의 작업 세계는 생물의 발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업 제목의 단어들, 영상과 퍼포먼스 속의 말소리들, 실제 전시장의 벽과 바닥에 ‘깔린’ 이미지들은 음성이자 물질로서, 자리를 바꾸고 다시 한 자리로 집적(集積)하며 보는 이들을 에워싼다. 말, 말이 되지 못한 소리, 그리고 문자, 문자가 되지 못한 이미지는 최윤의 현기증 나는 세계관을 이루는 재료다. 라익스 아카데미 레지던시 참여를 위해 서울의 거리를 떠나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는 언어-이미지 채집자이자 제작자, 최윤을 인터뷰했다.

이렇게 바꿔 써보는 이유는, ‘사물화’와 ‘대상화’의 뜻이 서로 에누리 없이 호환되지 않음을 짚기 위해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대상화’는 “어떠한 사물을 일정한 의미를 가진 인식의 대상이 되게 함”, “자기의 주관 안에 있는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밖에 있는 것으로 다룸”이라는 뜻이다. 즉 ‘대상화’란, 특정 존재를 구체화하여 ‘인식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이다. 말하자면, ‘성적 대상화’는 누군가를 나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인식·구성해내는 데에 필수적인 과정 을 뜻한다. “나는 내가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이기를 바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는 한 철학자의 전언이 시사하듯, ‘성적 대상화’는 단지 수동적이고 피학적이기만 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적 욕망을 인식하고 재현하기 위해 적극적·자발적으로 욕망하고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Re-legacy: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유산 또는 부채

중개된 몸

‘여성-주체-되기’와 시민권

대체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여성이 대상화·도구화되지 않는 것’이라는 대답이 즉각적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주체화’와 ‘대상화’는 정말 대립하는 개념일까? ‘대상화’나 ‘도구화’는 언제나 나쁘기만 할까? 이를테면, ‘성적 대상화’ 없이 자신을 성적인 존재로 인식하거나, 성적인 감정과 관계를 경험·재현할 수 있나?

위키백과는 ‘성적 대상화(sexual objectification)’를 ‘성적 객체화’ ‘성적 객관화’ ‘성적 사물화’와 동의어 관계에 있다고 풀이하는데, 이 정의에 따르면 ‘대상화’는 “한 개인을 그 사람의 품성이나 존엄성에 상관없이 상품이나 물건으로 취급하는 행위”다. 이때 방점은 “상품이나 물건으로”에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 정의와 보다 정확하게 조응하는 개념은 ‘성적 사물화’, 즉 ‘자신의 성적 욕망과 관련해 상대를 비인격화·탈인격화하는 인식 또는 행위’일 것이다.

장애인은 많은 비장애 여성들이 직장과 길거리에서 매일 직면하는 성적 대상화와 성희롱을 모면한다. 덕분에 나는 약간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든 시선을 그대로 받거나 피하는 와중에, 내가 성적인 추파까지 대처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감사한다. 다른 한편,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에게 쏟아지는 어떤 종류의 응시에도 성적인 응시가 없는 가운데, 우리는 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상실한다. 이 부재, 이 상실이 내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표현할 언어가 내겐 거의 없다.

— 최윤

대체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여성이 대상화·도구화되지 않는 것’이라는 대답이 즉각적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주체화’와 ‘대상화’는 정말 대립하는 개념일까? ‘대상화’나 ‘도구화’는 언제나 나쁘기만 할까? 이를테면, ‘성적 대상화’ 없이 자신을 성적인 존재로 인식하거나, 성적인 감정과 관계를 경험·재현할 수 있나?

위키백과는 ‘성적 대상화(sexual objectification)’를 ‘성적 객체화’ ‘성적 객관화’ ‘성적 사물화’와 동의어 관계에 있다고 풀이하는데, 이 정의에 따르면 ‘대상화’는 “한 개인을 그 사람의 품성이나 존엄성에 상관없이 상품이나 물건으로 취급하는 행위”다. 이때 방점은 “상품이나 물건으로”에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 정의와 보다 정확하게 조응하는 개념은 ‘성적 사물화’, 즉 ‘자신의 성적 욕망과 관련해 상대를 비인격화·탈인격화하는 인식 또는 행위’일 것이다.

Blackman, M. November 7, 2011, ‘Reflections on the Closing of the Project Space YOUNG BLACKMAN – from the corpse’s mouth’, Artthrob.

지난 20여 년 사이 서울은 훨씬 촘촘해졌고, 조용한 뒷골목이었던 창성동은 어느새 큰 길이 되었습니다. 동네의 1층은 패션숍과 인터내셔널 브랜드들로 채워졌고, 길을 향해 큰 창을 낸 팩토리는 주변의 다이나믹과 점점 달라져갔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어색함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돈 냄새 나지 않는 비영리 공간이 서울 한가운데 1층에 있는 것도 나름 쿨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달래면서요. 그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채웠지만,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팩토리2의 예술적 시도를 접하고 새로움을 느끼거나 소수성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팩토리2와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호흡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더 들썩이는 리듬으로 소비되고 빠르게 변해가는 풍경 앞에서, 오히려 우리만의 작은 감각을 더 담담하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금 더 오래 이 자리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여성-주체-되기’와 시민권

여성/퀴어가 주체가 되는 글쓰기?

작업실 일부를 열어두었을 뿐인데 자연스럽게 커머닝이 발생했고, 주변의 작은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끼며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자리가 특별한 마을이 되고, 도시 전체로 번져 나갔습니다. 정책이나 계획이 만들 수 없는, 오직 예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팩토리 역시 창성동의 지난 20년 동안 그런 존재이고 싶었고, 충분히 그랬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1.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HIV 감염인의 사회적/신체적 장애 경험과 법제도 마련을 위한 토론회 자료집』(미간행), 2019.10.18.
  2. 「에이즈와 장애, 가장 소수적 두 이름의 만남」, http://beminor.com/detail.php?number=7016.
  3. 유성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난다, 2020.
  4.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

지난 20여 년 사이 서울은 훨씬 촘촘해졌고, 조용한 뒷골목이었던 창성동은 어느새 큰 길이 되었습니다. 동네의 1층은 패션숍과 인터내셔널 브랜드들로 채워졌고, 길을 향해 큰 창을 낸 팩토리는 주변의 다이나믹과 점점 달라져갔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어색함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돈 냄새 나지 않는 비영리 공간이 서울 한가운데 1층에 있는 것도 나름 쿨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달래면서요. 그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채웠지만,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팩토리2의 예술적 시도를 접하고 새로움을 느끼거나 소수성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팩토리2와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호흡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더 들썩이는 리듬으로 소비되고 빠르게 변해가는 풍경 앞에서, 오히려 우리만의 작은 감각을 더 담담하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금 더 오래 이 자리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